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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스크롤’ 개발 디자이너도 나섰다…“이젠 정지신호 복원할 때”
2022-09-13
속임수 설계와 디자인 윤리
매끄러운 사용자경험·디자인 추구
‘무한스크롤’ 혁신기능이 중독 불러
웹 고도화는 전문가 윤리의식 요구
사용자가 원치 않는 프로그램까지 함께 설치하는 ‘바구니에 숨겨넣기’는 대표적인 다크 패턴이다. 국내 한 유명 동영상 재생프로그램 설치 화면. 해당 프로그램 설치를 승낙하는 메뉴에 많은 부가 프로그램도 함께 자동설치한다는 것을 감춰두고 있다.
사용자가 원치 않는 프로그램까지 함께 설치하는 ‘바구니에 숨겨넣기’는 대표적인 다크 패턴이다. 국내 한 유명 동영상 재생프로그램 설치 화면. 해당 프로그램 설치를 승낙하는 메뉴에 많은 부가 프로그램도 함께 자동설치한다는 것을 감춰두고 있다.

개발과 디자인의 목표였던 매끄러움이 디지털 세상에서 새로운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은 선녀 옷처럼 바느질 자국 없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만듦새를 일컫는 말인데, 오늘날 개발자와 디자이너들도 웹과 앱에서 ‘선녀 옷’을 짓고자 애쓴다. 정보기술 업계에서는 이를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Seamless User Experience)’이라고 부른다. 이용자가 디지털 서비스나 기기를 사용하면서 일련의 동작을 할 때 부자연스러움이나 문턱을 느끼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2007년 등장한 애플 아이폰이 ‘모바일 혁명’을 일으킨 것이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의 힘을 보여준다.

 

‘무한 스크롤’은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의 대표적 사례다. 페이지 넘김 단추가 아예 없고 더 많은 콘텐츠를 보고 싶을 때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올리기만 하면 새로운 내용이 하염없이 이어지는 방식이다. 페이스북, 틱톡,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는 물론 쇼핑몰과 상거래 페이지는 이음매 없이 무한히 콘텐츠가 이어진다.

 

스마트폰 이용시간과 의존도가 늘어나면서, ‘눈속임 설계(다크패턴)’ 디자인의 합법과 속임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법을 통한 규제 움직임도 있지만 다크패턴은 마케팅과 속임수의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규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정보기술의 발달과 고도화는 경계선을 더욱 모호하고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웹 초기와 달리 오늘날 웹과 앱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이용자 데이터를 분석해 개인별 맞춤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행동경제학과 심리학의 실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이용자 행동을 예측하고 유도하는 방법도 가능해졌다. 이용자가 복잡한 약관을 꼼꼼히 읽고 초기 설정을 변경해가며 이용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설계된 대로, 초기 설정된 대로 사용한다. 

 

웹 디자인이 전문 영역이 됨에 따라 설계자인 디자이너의 역할과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다크패턴의 영향력과 유해성 여부에 관련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며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이를 설계하고 효과를 측정하는 디자이너다. 눈속임 디자인은 ‘디자인 윤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구글에서 디자인 윤리학자를 지낸 트리스탄 해리스는 구글을 나와 ‘인도적 기술 센터(Center for Humane Technology)’를 설립해, 설득적 디지털 기술의 유해성을 고발해왔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소수의 디자이너와 개발자들이 세계 수십억명의 경험을 선택하게 하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며 설득적 기술이 인간의 취약점을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눈속임 설계’를 세상에 고발한 사람도 디자이너다. 영국의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인 해리 브리그널이 2010년 웹사이트(www.darkpatterns.org)를 개설하고 다크패턴 반대 캠페인을 벌이면서 윤리적 웹디자인에 대한 논의와 자료가 진척됐다. 사이트에는 이용자들이 경험한 다양한 속임수 디자인을 올려놓는 ‘수치의 전당’이 있다.

 

2006년 스마트폰에서 무한 스크롤 기능을 처음 개발한 디자이너는 에이자 래스킨이다. 몇 년 뒤 그는 자신이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을 위해 개발한 무한 스크롤이 정지신호가 없어 이용자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고 중독으로 빠뜨리는 현실을 보게 됐다. 래스킨은 자신의 개발에 대해 반성하고 트리스탄 해리스와 함께 ‘인도적 기술 센터’를 설립해 인터넷에 정지신호를 복원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디자이너와 연구원 등은 2021년 일반인들이 다크패턴을 신고할 수 있는 웹사이트(darkpatternstipline.org)를 개설해, 기만적 디자인의 사례를 수집· 공개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디자이너와 연구원 등은 2021년 일반인들이 다크패턴을 신고할 수 있는 웹사이트(darkpatternstipline.org)를 개설해, 기만적 디자인의 사례를 수집· 공개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디자인 윤리’에 대한 고민이 번지고 있다. 윤재영 홍익대 교수(시각디자인학)는 지난 7월 펴낸 <디자인 트랩>에서 이용자를 기만하는 다크패턴이 활개치는 현실을 고발하며 디자인 윤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윤 교수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디자인을 발주하는 기업은 이용자가 좀 더 오래 머물고 구매로 이어지도록 요구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디자이너는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며 “지금까지 디자이너들은 대개 주문을 받아 일을 수행하는 수동적 역할을 할뿐이라며 책임을 피해왔지만, 디자인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영향력만큼 책임이 따르는 일이라는 의식이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뉴스레터·블로그를 통해 디자인 철학을 전파하고 있는 디자인기업 라이트브레인의 황기석 대표는 “온라인에서 구독 모델이 늘어나면서 다크패턴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본다”며 “디자인 업계와 서비스 제공자 차원에서 고객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대학에서 디자인 윤리는 표절 금지 등 기술적 부분에 그쳐왔다. 디자이너의 확대된 영향력에 걸맞은 전문가로서의 윤리 의식을 고민하기 위한 학계와 전문가 집단의 본격적 논의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email protected] 

 

한겨레에서 보기 : https://www.hani.co.kr/arti/economy/it/1057466.html